안식월(Sabbatical month; 내가 조합한 단어)을 맞이해서 내가 가장 먼저, 가장 들떠서 계획한 일정은 전시회 관람이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내가 조금이라도 끌리는 곳이라면 모조리 예약했다. 대부분 모르는 작가들이다. 유일하게 내가 가 본 곳 중에 다시 가고 싶어서 간 곳이 국립중앙박물관이다.
항상 아이들과 같이 가다 보니 천천히 구경한 적은 없다. 그러나 영주 부석사 괘불과 실감관에서 관람한 금강산 사계, 정조 행차도 영상이 매우 인상 깊었기 때문에 다시 그 감동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코로나 조치가 조금 완화된 덕도 보고자 VR 실감도 예약했다. 오늘 오전에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폰 서핑을 하다가 13시 30분에 1자리 예약 남은 것을 11시 30분에 예약하고는 절반은 충동, 절반은 계획적으로 방문했다.
VR 실감체험은 유물이나 작품 감상보다는 VR을 체험해보는 것에 보다 의미 있었다. 한 타임당 3명씩만 예약을 받는 것처럼 보였기에(꽤 많은 사람들이 예약제인 것을 모르고 실감 2관에 왔다가 현장에서 되돌아갔다) 인싸감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기분이 꽤 좋아져서 아이들 없이 마음껏 관람할 수 있음(!)을 누렸다. 기분 좋아서 돌아다니다 보니 요즘 핫하다는 '사유의 방'에 도착했다. 내 앞에는 중절모와 지팡이를 짚으신 노신사가 천천히 걸어가서 그 모습을 보는 것부터 사유가 시작되었다. 괜히 그 노신사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젊어서도 예술을 누리셨기에 지금도 누리실 줄 아는 것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노년을 즐기시고 계신 것인가. 비교에서 얻는 기쁨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전자라면 내가 그렇게 닮고 싶고, 후자라면 그래도 나는 지금부터 즐기고 있는 것이라 다행인가 싶었다.
사유의 방은 입구가 좋았다. 딱 그 입구 통로의 길이만큼만 내가 사유했기 때문이다. 사실 전시실 내부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반가사유상들만 감상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신 그 사람들을 같이 감상했다. 가이드로 보이시는 분이 설명을 끝마치자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반가사유상 앞으로 헤쳐 모였다. 문득 자신의 요리를 사진 찍는 것을 금지한 모 프랑스 요리사의 사례가 생각났다. 내 과거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는 분명 사람들이 예술 앞이나 어떤 모든 것에서 핸드폰을 꺼내 드는 것에 대해 언론도, 어른들도, 일부 나도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나라니. 이 공간이 주는 감동을 담아가고 싶은 그 사람들의 행동도 감상의 일부인데 누가 그걸 비판할 수 있을까. 젓가락질 잘 못해도 밥 잘 먹는 요즘 사람들인데 현상 인식의 변화를 사유의 방에서 한 것이다.
사유의 방을 나와서 3층으로 갔다. 3층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무척 신났다. 그동안 중앙박물관에는 아이들과 함께 왔었던 터라 3층에 채 가기도 전에 방전이 되거나, 사달이 나거나 했기 때문이다. 3층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나서 누볐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거의 하이패스처럼 돌아다니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 바로 달항아리 백자 앞이다. 누비고 있을 때는 '백자가 뭐가 대단해' 하며 별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앞에서는 달랐다. 형용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형용하기 힘든 느낌? 안정적인 비율과, 안정적인 여백. 유일하게 배경의 프로젝션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차라리 없었으면, 아무것도 없었다면 이 완벽한 비율과 균형이 완성될 것 같았다. 그래도 여백이란 것은 무엇인가 있을 때 더 강조되는 것 같았다. 저 앞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진법에서의 1이 아니라 0이었다. 0을 강조하기 위해 또 다른 0과 과하지 않은 1이 중요한 것은 기념품점에서 느꼈다. 분명 전시장에서와 별다를 것 없는 달항아리 백자 모형일 것인데 기념품점 디스플레이에서는 왜 그렇게 보잘것없던지. 혼자서는 빛을 발하던 달항아리였는데 내로라하는 벌크 무리들과 같이 있으니 그렇게 풀 죽어 보일 수가 없었다.
달항아리 백자처럼 분명 빛이 나는 존재이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고 있는 것들도 많다. 나는 군중 속에서도 달항아리 백자를 찾고, 알아봐 주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싶다. 화려한 디스플레이 없이도 알아보고, 균형된 디스플레이 안에 안정적으로 놓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3층에서 찾은 또 다른 이야깃거리는 철불이다. 자세한 상세 내용은 따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고 첫인상, 첫 느낌만 기억하고 싶어서 이름은 모른다. 손이 없다. 많은 감각과 기능이 모여있는 손이 없다. 두 가지 양가감정이 들었다. 첫 번째는 두 손이 잘리고도 평온한 표정인 걸까. 두 번째는 두 손이 잘려서 아무것도 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표정인 걸까. 아마 둘 다 나의 모습인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희생하다 마비된 나의 모습.
이쯤 되어서는 피곤해져서 갑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하루에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신이 났던 생각들을 글로 남겨두니 기분이 상쾌하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싶은 생각들 저장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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